2023년 8월 8일, LPL 월드 챔피언십 선발전 마지막 날.
12벌의 새로운 검붉은 망토가 ‘시안 취장 스포츠 센터’ 무대 뒤편에 조용히 걸려 있었다. 그중 절반은 가슴팍에 WBG의 로고가 찍혀 있고 나머지 절반은 EDG의 것이었는데, LPL의 2023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출정복이었다. 전사들이 입을 옷은 두 가지 도안이 있었는데, 하나는 나머지 세 시드 팀과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먼지로 뒤덮일 운명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두 팀이 전력을 다해 승부를 펼치고 있으며, 2023 월드 챔피언십 진출권은 마지막 한 장만이 남은 채였다.
WBG는 2:1로 먼저 매치 포인트에 들어가 딱 한 경기만 더 이기면 가장 높은 경기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에 탑승할 수 있다. 하지만 4세트 초반에 상대에게 번번이 허점을 잡히며 위태로워졌고, 11분경에 EDG가 먼저 용을 치자 WBG는 막으려 했으나 되레 4명이 죽게 되었다. 양쪽 동료의 화면이 흑백으로 뒤덮인 와중, 유일하게 생존한 WBG의 원딜 선수 ‘왕광위(Light)’는 3킬 0데스의 바루스를 잡아내며 현상금을 얻었다.
이거 내가 캐리할 테니까 버텨.
라이트의 목소리는 팀원들의 환호 속에 거의 묻혀버릴 정도로 낮았다.
자신이 말한 대로 라이트는 직접 만들어낸 결정적인 순간들의 기회를 꽉 잡고 WBG의 역전을 이뤄냈다. 세계 무대에 복귀하는 동시에 명장 우지를 월드 챔피언십에서 단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막아냈다. 라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의 경기석으로 향했고, 우지는 라이트의 팔을 두드리며 신사다운 미소와 함께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5년 전, 라이트의 선수 생활의 첫 출발점은 우지가 승자로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그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때였다.
1. 입단
2018년 3월 18일, LPL 스프링 정규 경기가 있는 평범한 날.
RNG를 상대한 SS(Snake Esports)는 1세트를 내어주게 되자 원딜 자리를 신인 선수 라이트로 교체했는데, 이 이름은 LPL은 고사하고 2부 리그 경기장에서조차도 등장한 적 없었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이 낯설고 풋풋한 얼굴을 ‘SS가 데려온 몇 달 전 한국 서버를 등정한 연습생’이라는 해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LPL의 지평선 위로 예상치 못한 한 줄기의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당시 SS는 팀 창단 이래로 단 한 번도 RNG를 이긴 적 없었고, 1년 내내 ‘혈통의 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 앞에 선 것은 2018년의 황금기를 누린 RNG였다. 대회 경험이 전무한 신인 원딜 선수는 데뷔전에서 전성기의 우지와 맞붙게 되었는데, 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살아남는’ 일과 같았다.
물론 아쉽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 경기에서 우지의 코그모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 SS는 2-0으로 패배했고, RNG는 7연승을 기록한 날이었다.
스프링 일정 중 라이트는 3개의 경기에 출전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케이틀린으로는 자야를 상대할 수 없었고, 자야로는 트리스타나를 상대할 수 없었고, 트리스타나로는 코그모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한국 서버의 꽃을 꺾어 경기장에 옮겨 심었지만, 풍토에 맞지 않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서 이 봄의 남은 시간 동안 라이트는 더 이상의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18년의 LPL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재 소년들이고, 원딜의 자리는 특히나 신인들이 폭풍과도 같은 기세였다. iG의 JackeyLove, EDG의 iBoy, RNG의 Able까지――라이트의 짧고 조잡했던 등장은 잔물결조차 튀지 않는, 작은 먼지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심지어 조연의 자리조차 비집지 못하는 것은 그저 LPL에 오가는 수많은 그림자 중 하나, 잘 보이거나 기억될 기회조차 없는 얼굴에 가까웠다.
당연히 SS가 데려온 신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다.
2. 기점
라이트가 SS에 합류한 것도 어느 정도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처음 LPL에 오르기 1년 전, 라이트는 ‘진(秦)’이라는 PC방 팀에서 전국 대회를 통해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산시성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다음 전국 대회에서 EDG 연습생팀을 만나게 됐고, 풀뿌리 같은 팀과 정예군이 충돌한 결과는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라이트를 가로막은 상대 선수는 훗날 LPL에서 가장 빠른 리그 우승 기록을 세운 ‘iBoy’ 후셴자오였다. iBoy는 라이트를 무너뜨린 뒤 결승전에 진출했고, 이때의 상대가 이미 ‘JackeyLove’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친 위원보였다. 2018년에 LPL에 등장한 이 쌍둥이 신성의 만남은 공식적인 첫 대결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라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전국 대회가 끝난 후, ‘진(秦)’ PC방 사장의 추천으로 한동안 EDG에서 시험 훈련을 치렀다. 하지만 당시에 iBoy를 보유하고 있던 EDG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곧 EDG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 솔랭 점수 올리기에 매진했다. 1~2주 동안 라이트는 2~300점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고, 이때 한 친구가 라이트를 상하이로 불러 시험 훈련을 권장했다.
사실 당시에 시험 훈련을 보기로 했던 것은 다른 팀이었는데, 라이트도 왜 목적지가 바뀌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친구를 따라갔다. 라이트는 SS의 숙소 아래층에 서서야 SS와 그가 남지 못한 EDG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트는 그날 새벽 4시에 SS의 책임자였던 ‘주오위(左雾)’의 방문을 두드렸던 일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달빛을 머리에 이고 별빛을 받으며 시험 훈련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을 테니까. 주오위는 라이트에게 한국 서버 닉네임이 무엇인지 물었고, 라이트의 대답은 “영어여서 잘 기억 못하는데...”였다.
주오위는 우선 라이트를 잠자리에 들게 했고, 이튿날 컴퓨터 한 대를 마련해주었다. 라이트의 집에서 점수 올리기는 SS 숙소에서 점수 올리기로 바뀌었다.
“그들은 나의 비교적 높은 점수 아니면 좀 어렸던 것을 눈여겨봤던 것 같다.”
라이트는 그렇게 SS에 남게 됐고, 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 서버를 등정한 선수가 되었다. 그 후 5년 동안 상해에서 충칭, 그리고 쑤저우에 이르기까지 줄곧 뜨고 가라앉음을 거듭했다.
처음에 라이트는 ‘게이머’에서 ‘선수’로 변화하려는 명확한 의식이 없었다. 경기장에 대한 특별한 갈망이나 구체적인 개념이 없었고, 그저 게임에 몰두하는 방법만 알고 있었다. LPL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경기를 보러 가본 적도 없었다.
과거에 순위를 올리던 자신과의 유일한 차이점은 이제 1군 훈련실로 이사하였고, 1군의 스크림도 지켜봤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기억 속에서 그때의 동료들은 모두 자신을 각별하게 챙겨줬다고 한다.
당시 SS에서 주전 원딜이었던 ‘크리스탈 형제’ 양판(杨藩)은 기억 속 라이트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정말 어렸다. 내가 처음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 어렸다. 그리고 굉장히 수줍음이 많았고,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어서 누구와 말을 하든 쑥스러워했다.”
같은 포지션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오히려 사이가 좋았다. 비록 라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크리스탈은 항상 라이트가 자신과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움직이는 표상 아래에서 프로 선수인 두 사람은 비슷한 알맹이를 갖고 있었다. 의자 등 뒤에 엎드려 솔랭을 관찰하는 꼬마에서부터 바텀의 중임을 함께 짊어진 전우, 그리고 거대한 깃발을 받은 계승자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탈은 라이트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주시했다.
2019년, 크리스탈은 SS를 떠났고 라이트는 팀의 이름이 LNG로 바뀌는 것을 함께 목도하고 겪었다.
2022년 말에 라이트는 WBG에 합류했고, 그전에 크리스탈도 WBG의 모회사인 ‘웨이징문화(微竞文化)’의 소속 스트리머가 되었다.
그 후 설 연휴 동안 크리스탈은 라이트를 불러 함께 동북부로 돌아가 새해를 보냈다. 라이트를 대접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아무런 요구사항이 없어서 크리스탈이 무슨 게임을 하라고 하면 하고, 먹으라고 하면 따라 먹는다. 물어보면 여긴 안 가고 싶다든가 이건 안 먹고 싶다 하는 법 없이 무조건 다 괜찮다고 말한다.
크리스탈은 매일 같이 밥 먹고 게임을 하는 것 말고는 충분히 집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았고, 그리하여 남방 사람인 라이트를 이끌고 최초의 스키 체험을 달성했다.
“악몽을 꾸게 하는 것과 같은 무중력감. 좀 무서웠고, 밑에서 넘어지는 건 아닌가 싶었다.”
라이트는 스키 타는 느낌을 이렇게 묘사했는데, 처음 LPL이라는 전장에 뛰어들었을 때도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계속 못하니까 그때 경기를 하는 게 두려웠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공황 상태였다.”
스키장에서의 ‘밑에서 넘어질지도 모르는 느낌’처럼 경기장에서의 라이트도 ‘다음 경기에서 크게 터져버릴도 모르는 느낌’을 걱정해왔다.
3. 무중력
‘막막함’은 라이트가 자신의 데뷔 시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어휘이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2018년 서머, 다시 기용된 라이트는 출전하자마자 스프링의 퇴세를 씻어내고 첫 LPL 승리를 따낸 후 3연승을 달렸지만 본질적인 성장은 느끼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누워서 이긴 셈이었다. 소통도 전혀 안 됐고, 모두 동료들이 주도했다.”
이후 10번의 BO3에도 모두 선발로 출전했지만, 그중 단 한 경기만 이기는 데 그쳐 시즌 BO3 승률이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SS는 내부 합숙 훈련을 발표했다. 1군과 2군을 섞어 훈련하고, 다가올 새 시즌 명단은 이 합숙 훈련 결과를 참고할 예정이었다.
라이트는 사실 그때 자신이 2부 리그로 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됐어도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은 여유롭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비록 5년이나 지난 순간이지만, 그때의 장면은 여전히 라이트의 뇌리에 생생히 남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주카이가 라이트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라이트, 나는 너에게 이 마음에 한 점 부끄러운 게 없어.”
주카이는 라이트의 눈을 보고 말했다.
“네 마음속에는 책임감이라는 게 있어? 원딜로서 팀을 돕기 위해 뭘 할 수 있지?”
주카이는 겨우 절반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라이트는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면서 주카이에게 사과하자 주카이는 자신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너 자신에게 물어봐. 스스로 떳떳해?”
라이트는 그때를 회상하며 “나를 너무 울컥하게 했다. 방에 숨어서 한 30분~1시간 동안 울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농담이 아니고 주카이가 너무 싫었다. 하하. 주카이 본인의 시각에서는 내가 일부러 그렇게 플레이한다고 생각해서 나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지금은 주카이에게 정말 감사하다. 그때 확실히 LPL에서 더 싸울 힘이 없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주카이가 나를 내린 이후부터 나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계속 경기하고 싶다는 나만의 신념이 생겼고, 그때부터 열심히 배우고 싶어서 계속 부딪혔다.”
라이트는 주카이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이를 갈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주카이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내 선수 생활 최초로 시작된 게임에 대한 이해, 사고의 구조 등 모두 주카이가 가르쳐줬고, 내게 위기감을 심어준 사람이다. 바로 이런 위기감이 내가 잘 싸우고 싶게 만들고, 많은 것을 잘하고 싶게 하고... 어쨌든 당시에 주카이가 나를 LPL에서 쫓아낸 것에 정말 감사하다.”
지금 생각해도 라이트는 당시의 자신은 ‘전혀 캐리가 되지 않는 원딜’이고, “캐리가 없다면 원딜을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몇 주 후, SS 1군은 계속 충칭에 머물렀고, 라이트는 2군과 함께 상하이로 돌아가 LDL 경기를 준비하게 되면서 1년 동안 함께한 동료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1부 리그에서 2부 리그로 온 라이트가 보여줄 것이라 상상했던 ‘체급 차이’는 펼쳐지지 못했다.
“처음에 LDL에 갔을 때는 적응이 잘 된 것 같았다. 몇 경기까지는 잘 싸웠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점점 상황이 이상해졌다.”
팀 동료들은 거의 모두가 신인이었고, 그중 라이트는 이미 대회 경험이 가장 풍부한 선수였다. 하지만 팀을 이끌며 한 걸음씩 더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 팀 순위는 계속해서 급강하했다.
“LDL에서 너무 많이 지면 나중에는 급기야 마음가짐이 좀 차분해진다. 지면 지는 거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라이트는 패배에 거의 무감각해질 정도로 졌다.
“아마도 LPL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괴롭겠죠.”
2019 LDL 서머 스플릿에서 이들은 25개 팀 중 꼴찌를 기록했다. 하지만 라이트는 솔랭에서 여전히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것은 수렁에 빠진 라이트의 손에 꼭 쥐어진 마지막이자 유일한 밧줄이 되었다. 이 때문인지 2019년의 시즌이 끝난 뒤 라이트를 1군으로 복귀시키라는 통보를 받았고, 라이트는 “사실 내가 그렇게 못했는데도 왜 LPL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라며 자조했다.
다시 1군으로 돌아오자 더는 SS라는 팀은 존재하지 않았다. LNG의 숙소도 충칭에서 쑤저우로 이사했고, 한때의 동료들도 ‘성총 형제’ Flandre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라이트가 없던 한 해 동안 LNG는 다른 신인 선수 Asura를 바텀에 투입했기에 라이트는 그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만 했고, 스프링에서는 등판보다 지켜보는 것이 더 많았다.
“몇 경기밖에 안 뛰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1세트에서 지면 2세트에서 선수 교체되는 식이었을 것이다.”
그간 라이트가 자신감을 지켜올 수 있었던 솔랭 순위도 한계에 이르렀고, 손에 잡히는 대로 따라왔던 승점도 난관이 되기 시작했다. 서머에서는 유일한 원딜로서 주전이 되었지만, 2020년의 LNG는 두 시즌 모두 정규 리그에서 멈췄다.
“1년 동안 LDL에서 싸우고 돌아오니 또 1년 동안 학대당했다.”
라이트는 그 2년을 웃어넘겼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의 나는 LPL 최악의 원딜이었다.”
당시의 자신에 대한 평가였다.
4. 돌파
라이트의 이스포츠 여정은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2021년의 LNG는 대대적인 ‘물갈이’를 시작했고, 바텀 듀오만 변하지 않았다. 탑은 Ale와 M1kuya라는 새로운 피로 보강했고 미드는 노장 Icon을 초청했으며, 정글은 LCK에서 그리핀의 ‘정글의 왕’ Tarzan을 영입했다.
라이트가 한국인 선수와 호흡을 맞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 정글러는 베트남 국적의 SofM이었는데, 라이트가 입단했을 때 SofM은 이미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팀에 Tarzan이 처음 왔을 때, 두 사람은 마주치면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타잔은 놀라운 언어 재능과 습득력을 보여 곧 이들의 의사소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팀의 적응도도 나날이 향상되었다.
스프링 시즌, LNG는 정규 시즌 10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라이트가 LPL에 처음 오른 그 시즌, 당시에도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긴 했지만 라이트는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것은 라이트에게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로 LPL 플레이오프의 전장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여정은 시작하자마자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완전히 무너졌다. 상대는 빈틈이 없었고, 우리를 장난감 다루듯이 이겼다.”
라이트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 쑤닝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프링 정규 리그 내내 뛰다가 이렇게 쉽게 플레이오프에서 완전히 탈락하는 느낌은 꽤 불쾌하다.”
하지만 그 충격도 잠시, 첫 플레이오프 경험은 라이트의 눈앞에 새로운 청사진을 열어주기도 했다.
“플레이오프는 정규 리그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특별하다는 걸 느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다음 플레이오프에선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같다.”
서머에서 팀은 한 걸음 더 나아갔고, 라이트는 처음으로 정규 리그 BO3 승률을 절반 이상 달성했다. LNG는 8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최종적으로는 4위를 차지했다. 이는 라이트의 개인 기록 돌파일 뿐만 아니라 LNG에게 월즈 선발전에 참가할 수 있는 점수도 가져다주었다.
LNG의 선발전 첫 상대는 이번 시즌에 맹렬한 기세였던 정규 리그 3위 RA였다.
“솔직히 그동안 월즈에 진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다. 결국 스프링과 서머 두 시즌 모두 팀이 낮은 순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LPL의 ‘우등생’ 반열에 들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팀이 RA를 3:0으로 휩쓸고 나니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은 라이트의 생애 첫 월즈이자 LNG가 팀 역사상 최초로 해외 원정 기록을 남긴 것이었다.
한때 SS에게 월드 챔피언십은 그들이 버릴 수 없는 숙원이자 저주였다. ‘우리는 더는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은 해마다 허사가 되고, ‘1일 BO10’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꼬리표가 되고, 깃발이 바뀔 때까지도 그들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동료였던 여행자들의 완성되지 못한 꿈은 비로소 라이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크리스탈은 라이트가 월즈에 진출한 것에 대해 “이 사람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학대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예선에서 LNG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전 전승으로 조별리그에 들어갔고, 젠지·MAD·TL과 2개의 녹아웃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하지만 4개의 팀이 3-3 동률을 기록하게 되며 월즈 역사상 최초의 4자 동률 경기를 하게 되는 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LNG와 MAD는 조 2위 경쟁을 펼쳤고, 이내 패배하며 조별리그에서 멈췄다. 라이트의 첫 월드 챔피언십 여정은 16강으로 마침표를 찍었고, 도합 11번의 BO1밖에 치르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좋은 결과일 수 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부터 2라운드, 3라운드까지 2번 지고 선발전에 진출하여 2경기를 더 치를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2연승으로 월즈에 진출했고, 이것은 나오기 어렵고 힘든 장면이다. 그래서 그 결말이 우리에게는 행운이라고 여겼고, 우리는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라이트는 경기가 끝난 후의 팀 내 분위기를 ‘일종의 해탈’로 묘사했다. 사실 이런 결과에 대해 팀원들 모두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다.
“분명히 끝까지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명확히 느끼는 것 중 하나는 팀이 가진 단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비록 충분히 예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이지만, 월즈 진출부터가 애초 기대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경기장을 떠나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아쉬움은 여전히 오래도록 맴돌 것이다.
아이슬란드에서 귀국하여 격리된 한 달여 동안 라이트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MAD전에서의 마지막 한타, LNG의 넥서스 근처 공격, 하나 남은 MAD의 쌍둥이 타워, 하지만 MAD 정글 키아나의 완벽한 기습으로인해 물거품이 된 지척의 승리.
“날마다 머릿속에 이 장면이 있는데, 나는 키아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마 한 달 넘게 잠을 못 잤거나 그냥 틈만 나면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머릿속에서 몇 번을 재생하든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든 최종 결과는 바꿀 수 없다.
“솔직히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자기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라이트가 월즈에서 가장 많이 보여준 것은 역시 안정감이다. 정말 안정적이다. 매 판 사고가 나는 건 없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빛을 발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사람들은 단지 라이트가 안정적이라는 것만 알게 되지, 기억하지는 못한다.”
라이트의 첫 월드 챔피언십 여정에 대한 크리스탈의 평가였다.
‘안정’은 많은 사람이 경기장의 라이트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연상하는 형용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단어의 이면에 있는 지향점이 과연 긍정인가 부정인가에 대해서는 결국 승부의 결과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5. 도전
새 시즌에는 도인비가 LNG에 합류해 미드에 자리 잡았고, 탑과 서포터도 어린 선수들로 로테이션을 시작했다. 2022년의 LNG는 리그에서 안정된 발전을 계속해서 보여주며 서머에서 재차 4위와 선발전 자리를 따내었다.
많은 사람이 LNG가 전년도의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선발전 최종일에 그들은 RNG에게 5세트를 내어주며 그해의 월즈와는 그저 어깨만 스치고 지나가게 되었다. 이것은 라이트의 선수 생활에서 아직도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남았다. 당시에 감독에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자신감이 부족했다며, 그 순간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결말이 다르진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2년 연속으로 LNG가 서머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시작하여 선발전 최종 라운드까지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두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강해지고 상대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어우러져 팀의 구심력을 구성한다, 그들이 항상 후반에 힘을 낼 수 있던 이유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라이트는 줄곧 동료가 떠나는 것을 지켜봐왔다. 이번 선발전이 LNG와의 마지막 동행이 될 때까지.
2022년 12월 12일, LNG는 라이트가 데뷔부터 5년 동안 몸담아온 팀을 떠나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이어 WBG는 새해에 라이트가 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것임을 발표했다.
2022년 WBG의 서머 여정은 LNG의 손에서 막을 내렸고, 월즈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이적시장 동안 이들은 대대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있었는데, 탑의 더샤이를 제외한 나머지 자리가 모두 조정됐다. 미드와 정글은 MSI 우승을 함께 거머쥐었던 오랜 동료 샤오후와 카사, 서포터는 2019 월즈 챔피언 크리스피가 맡았다.
물론 LNG에 있는 동안 라이트도 잇따라 유명한 선수들과 함께한 적이 있지만, 이런 ‘올스타’ 동료는 선수 생활 최초였다. 이것이 WBG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선수단으로는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일 것이다.”
‘뤼루이(吕锐)’ 코치가 기억하기로는 라이트는 다 같이 모이기로 한 시각이 되기도 전에 일찍 숙소에 왔다. 라이트에 대한 첫인상은 대부분의 사람과 같았다. 사람을 약간 기피하고 수줍음을 잘 탄다는 것.
처음 왔을 때 라이트는 인터넷에서 적지 않은 생필품을 구매했고 뤼루이는 택배를 방으로 옮겨줬는데, 그 답례로 커피를 받았다. 인간관계에서의 라이트의 성숙하고 빈틈없는 모습은 오히려 뤼루이에게 다소 의외로 다가왔고, 크리스탈 또한 자기 집에 올 때 선물을 들고 와놀랐다고 했다. 선수 생활로 맺어져 일잔적인 궤를 벗어난 우정은 보통 사소한 일에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이렇게 섬세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라이트는 나보다 훨씬 어리니까 밥 같은 걸 먹으면 당연히 내가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라이트가 사기도 한다. 플랑드레였으면 절대 안 샀다.”
이 점에 대해 라이트는 사람은 모두 상호적인 것이기에 자신이 특별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말처럼 새로운 환경에 있는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새로운 친구들에게 많은 따뜻함을 받았다. 숙소에 막 도착했을 때는 아직 겨울이었는데, 에어컨이 고장 나서 찬 바람만 나오고 있었다. 그때 춥다고 몇 마디 중얼거리던 걸 들은 카사가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기계를 사주었다고 한다.
‘대인기피’ 라이트가 선의와 호감을 표시하는 방식 또한 굉장히 개인적인 특색이 있다. 몇몇 WBG 직원들이 언급했었듯이 배달 음식을시킬 때 라이트는 묵묵히 몇 인분을 시키곤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같이 먹을 수 있게 놔둔다.
더샤이 생방송에서도 라이트가 딸기를 선물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귀여워.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와서는 주고 갔어. 한마디도 안 했어.”
6. 파벽
서로를 알아가고 달려가는 과정에서 예정대로 새 시즌이 시작됐다. 전과는 달리 아시안 게임 일정 때문에 2023년 리그 경기 일정이 과거보다 훨씬 빠듯해져 훈련 스트레스가 부쩍 높아졌다. 특히 선수단 변동이 큰 팀의 경우에는 시행착오를 거칠 기회와 조정 시간이 부족했다.
스프링 첫 경기에서 TES와 맞붙게 된 새로운 WBG는 좋은 출발을 했고, 4연승을 달리던 JDG를 또 말에서 끌어 내렸다. 간혹 패배도 있었지만, 상위권을 지켰다.
3월 11일, WBG는 RNG와 맞붙었다. 결정적인 의미는 없는 정규 시즌 경기로, 세월이 흘러 무슨 경기인지 단번에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날’이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이 문득 크게 알아차릴 것이다.
너는 이날이 또 하나의 아주 평범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후에야 이것이 사실 너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날은 영원히 다시 없을 것이다.
RNG의 미드 Angel 선수가 WBG를 꺾은 뒤 웨이보에 올린 글로, 이 문장은 한때 LPL을 휩쓸었고 선수들이 결정적인 경기를 이겼을 때 너도나도 인용했다.
Angel은 WBG의 선수였다가 2023년에 RNG로 합류했고, RNG의 전 미드였던 Xiaohu는 같은 해에 WBG에 합류했다. 두 팀의 미드 교환으로 이 경기의 결과가 주목받게 됐고, 이런 대국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쪽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의 마음을 고조시킬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맞은편의 패배자들이 받는 고통 또한 크다. 라이트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까지 겨우 눈물을 참았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내내 눈가를 닦았다.
“오늘 샤오후가 이길 수 있게 돕고 싶었는데... LNG는 이기지 못했지만 샤오후의 승리를 꼭 돕고 싶었는데...”
비록 경기 전에 Xiaohu는 이번 경기에 대한 의식의 정도가 다른 경기들 이상이 되진 않는다고 거듭 밝혔고, ‘친정팀 징크스’도 없었다. 하지만 라이트는 어린아이 같은 집요함으로 그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고 고집했다.
“LNG와 붙을 때 나는 너무 이기고 싶었다. 물론 상대와의 관계가 좋은 건 맞지만, 실상 속으로는 이기고 싶었다.”
자기의 마음을 타인에게 미루어봤을 때, 라이트는 틀림없이 Xiaohu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대의 특수성을 떠나 경기의 패배 자체도 큰 타격을 안겼다.
“원래 우리는 LPL을 비롯하여 월즈에서 가장 강한 팀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EDG에게 지기 전부터 나는 심리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우리가 세계 최고의 팀들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차이는 소화가 좀 어렵다. 소화할 준비가 되기도 전에 이미 이런 게 나타났다."
RNG와의 이 경기는 라이트에게 자신의 커리어에서 최악의 경기가 될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경기가 끝난 뒤 WBG는 위아래 사람 모두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경기장 대기실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단장이 보기에는 EDG와 RNG에게 연거푸 지고 다들 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지만, 선수들끼리 서로 질책하고 싶지 않고 자기가 좀 참으면 지나가리라 믿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를 은폐한다고 해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점점 더 큰 갈등을 낳을 수 있다. 훈련팀은 이 기회를 통해 전부 마음속에 묻어뒀던 말을 꺼낼 수 있기를 바랐다.
라이트의 차례가 되자 이번 경기가 자기의 자신감을 떨어뜨렸다며, 바텀이 너무 못해서 경기가 무너진 것 같다고 말했다. 감정이 너무 벅차오른 라이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코칭스태프가 나서서 자기들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후 라이트는 마침내 솔직하게 말했다.
“바텀 간의 소통에 문제가 존재한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인게임적 습관은 완전히 같지 않다. 일단 디테일한 소통이 완전하지 않고, 이것이 게임에서 드러나면 상대가 유기적으로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마음속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문제점과 생각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결국 라이트는 자신의 서폿 동료인 크리스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한 가지만 약속해줘. 내일부터, 내일부터...”――라이트는 ‘내일부터’를 연신 내뱉었다.
“우리 스크림에서 100% 컨디션으로 전념하자. 그리고 밴픽 끝나고 게임에 들어가게 되면 바텀에서 어떻게 할지 미리 얘기하고...”
크리스피는 이 말을 듣자마자 대답했다.
“내일부터는 오늘 말한 이 모든 문제가 더는 없는 거야.”
샤오후도 라이트를 위로하러 가서 특유의 어조로 “괜찮아, 라이트. 우리에겐 아직 플레이오프 기회가 있어.”라며 느릿하게 말했다.
라이트의 마음은 점점 진정되었고, 경기장을 나온 뒤 크리스피와 함께 차분하게 경기의 디테일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게임에서의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했고, 역으로 Easyhoon을 위로하기도 했다. 라이트는 자기가 잘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욕먹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모든 걸 털어놓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됐지만, WBG의 관계자들은 여전히 다음 경기에 대한 은근한 걱정이 있었다. 하루만 쉬고 나면 그들의 위에 있는 OMG와 맞붙게 되는데, 확실히 하루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웠다.
3월 13일, WBG는 깔끔하게 2:0으로 이기며 무거운 분위기를 씻어냈다.
“라이트가 경기하면서 자신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 펜타킬과 이후에 쿼드라킬까지. 보이스 들어보면 마치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의기양양함이 느껴진다.”
WBG의 정규 시즌 마지막은 한 경기도 내주지 않은 채 4연승으로 끝났다.
“예전에는 다들 많이 참았던 것 같다. 진작에 많은 말들을 해야 했지만 제대로 안 해서 지금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사실 분명하게 털어놓고 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다. 누구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신호이고, 다섯 명이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한 경기에서 졌다고 해서 계속 미끄러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7. 이완
라이트의 서머 경기는 스프링과 비교하여 WBG 관계자들이 ‘느슨’이라는 두 글자에 비유했고, 라이트 자신도 이 단어를 인정했다.
“그동안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고 뭘 해도 즐겁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긴장이 풀렸을 수 있다. 우리 바텀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은데, 서머 시즌 초반에는 계속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는 나도 마음이 급해져서 크리스피에게도 큰 부담감을 주게 되었고, 서로 스트레스를 주게 되면서 우리 둘 다 바텀에서 잘하지 못했다.”
크리스탈도 이에 대해 언급했다.
“라이트의 가장 큰 장점은 게임에 굉장히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매 판 이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단점은 너무 이기고 싶어 해서, 경기에서 못했거나 지게 되면 그 감정과 기분이 모두에 얼굴에 그대로 쓰여 팀원이나 다른 사람에게 압박감을 줄 수 있다.”
서머 시즌에는 세계 챔피언 대니 감독이 합류하게 되었고, 새로운 감독과의 호흡에서 라이트의 관념도 조금씩 변화했다.
“라인전에서 해선 안 될 실수를 하고 나면 나는 도저히 더는 못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내 시각에서는 이미 망가진 것처럼 느껴져 동료들에게 압박감을 주기 십상이다.”
원딜러로서 라인전의 기본기가 중요하긴 하지만, 라이트의 한시적인 라인전 집착은 되레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라인전에서 상대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한타에서 팀원들 간의 호흡이 잘 맞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딜을 넣는 것도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이트는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팀을 기반으로 해야 하고, 오히려 이것이 우리가 더 좋아질 방법이라고 말했다.
WBG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크리스피는 서머 시즌 내내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줬다며 이기기 위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변화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라이트의 경우에는 더는 그런 큰 짐을 지지 않을 것이고, 한타에서 동료들을 더 믿을 것이고, 스스로 느끼는 압박감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라이트가 말했다.
“사실 한 가지 깨닫게 된 건, 잘 싸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면 그냥 최선을 다해 스스로 잘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잘하는 것이 팀에 도움이 될 방법이다.”
원딜로서 팀을 돕기 위해 뭘 할 수 있지?
――5년 전, 주카이가 라이트에게 던진 질문에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이 문제는 유일의 정답이 없다. 처음에 라이트는 팀을 지탱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래서 더 많은 책임을 지기로 했다.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자기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제는 자신을 팀적인 방향으로 기울였다. 줄곧 비틀거리며 걷는 모양새일지라도 끊임없이 그 발걸음을 위로 이끌며 조정하고 있다.
SS 시절의 다큐멘터리에서, 과묵했던 라이트는 자신의 우상인 우지를 언급했다.
“나는 예전에 솔랭에서 날마다 우지한테 얻어맞았는데, 그 이후로 우지의 팬이 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목표는 언젠가 우지가 인터뷰에서나를 언급하고, 나를 눈여겨보고 주목하게 되는 상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5년 후, 라이트의 접두사는 SS에서 WBG로 바뀌었고, 적수이자 우상의 접두사는 RNG에서 EDG로 바뀌었다. 라이트는 마침내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표를 그 이상으로 달성했고, 해묵은 꿈을 직접 세계와 미래로 가는 다리로 안배했다.
선발전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크리스피는 월즈 복귀로 눈물을 쏟았지만, 무대 뒤의 라이트는 굉장히 평온했다. 라이트에게는 ‘월즈 진출’이라는 사실보다 ‘월즈에서의 활약’이 더 중요하다.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 월즈를 지켜봐라. 과연 내가 무엇을 만들어낼지.”
천재적인 원딜이 대거 탄생하는 LPL이라는 리그에서 관중들이 생각하는 강한 원딜의 형상은 종종 칼끝의 피를 핥고, 결사의 각오로 출진하고, 사냥꾼의 기개와 자객의 풍모를 겸비하는 것이다.
라이트의 등장은 놀랍지 않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며, 날리는 먼지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달려 나갈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재능 또한 얻지 못했다. 하지만 운명은 여전히 라이트를 돌보았으니, 어둡고 막막한 시간과 몇 차례의 침체기에 빠졌을 때 비난과 의문이 있었을지언정 진정으로 포기된 적은 없다.
당시에 한국 서버 정상에 올라 SnakeLight로 닉네임을 변경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전, 라이트가 사용한 닉네임은 ‘ifhaiyouTomorrow(如果还有明天, 내일이 있다면)’였다. 이 중국어와 영어가 조합된 닉네임으로 인해 중국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적 있었다.
라이트가 몇 번이고 ‘내일부터’를 반복했듯이, ‘내일은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때마다 운명은 긍정했고 라이트 또한 모든 내일을 붙잡았다.
이 무대에서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유명해져 단번에 성공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한 걸음씩 내디뎌 천 리를 가며 오랜 내공을 쌓는다. 구석에만 서 있던 사람도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며 무대 중앙까지 도달할 수 있다.
라이트는 ‘왕광위(王光宇)’라는 본명의 ‘빛(光)’을 Light로 직역하여 선수명으로 삼았지만, 시청자들은 중국 별명인 ‘등불(灯)’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한 개의 등불이 뿜어내는 빛은 순간의 눈길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온화하고 따뜻하다.
WBG의 화려한 선수 명단에서 라이트의 이력은 다소 암울할 수 있지만, 등불은 자기만의 빛나는 방식을 찾아 해, 달, 별과 함께 서로를 빛낼 수도 있다.
길고 긴 발걸음을 헤치고 나면, 콩처럼 희미한 불빛의 등불은 낮과 같은 등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