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송은 FPX에서 항상 가장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FPX 창단 2주년을 축하하는 자리, 사회자 ‘캔디스’는 그에게 다른 팀원들과 코치진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네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그럴 가치가 없어요.”
모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이렇게 의연한 얼굴로 입에서 향기를 내뱉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팀의 인기 선수인 도인비에 비해 류청송은 눈에 띄는 편이 아닐뿐더러 서포터라는 포지션 특성상 빛을 발하기도 쉽지 않다. 2019 월드 챔피언십(이하 월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도 LPL에서 가장 강한 서포터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류청송은 여전히 팀 동료인 도인비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주로 그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과묵하고, 담담하고, 늘 무감한 얼굴과 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하고, 자신의 웃음 포인트가 건드려져도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을 뿐이다. 파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나머지 4명은 모두 감격에 젖은 채 의자에서 뛰어올라 서로를 껴안았지만, 오직 류청송만이 한쪽에 서서 동료들의 품에 끌어안겨질 때까지 살포시 웃고 있었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그가 ‘말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되레 크고 작은 경기들을 보면 이 사람은 자신의 ‘광(狂)’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019 월즈 8강, FPX가 프나틱과 맞붙었을 때 프나틱 팬들의 환호가 현장을 뒤덮었다. 이후 FPX가 3-1로 승리를 거두게 되자 류청송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조금 화가 났어요. 너무 시끄러워서, 게임에서 패고 조용히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회자는 여전히 캔디스였다. 그녀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올려 류청송을 쳐다보았지만, 두 손을 등 뒤에 짊어진 그는 여전히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띠지 않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같은 겸손의 자세는 늘 중국의 전통적인 미덕으로 여겨져 왔고, 수년 동안 이 정도 규모의 대회에서 이런 ‘독설’을 가한 중국 선수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류청송의 이 말은 적지 않은 논쟁을 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경기에서 이긴 자가 왕이니, 이기면 무릇 당당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며, 정말로 겸손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FPX 안에서의 이런 말들은 따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며, ‘디스전’이 이미 오랫동안 팀의 색깔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류청송의 2019년 활약에 비추어봤을 때, 그는 분명히 이렇게(狂) 자신감 넘칠 자격이 있었다.
행동하는 자는 말에 기대지 않는다――바로 류청송이다.
1.
“제 부모님은 제가 아주 어릴 때 이혼하셨어요.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나오셨죠. 이 사실이 저에게 끼치는 영향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냥, 저랑 함께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죠. 저 혼자 있거나 외할머니와 함께 있던 시간이 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이 말을 한 류청송은 마치 사탕을 간절히 원하지만 꾸짖음이 무서워 철이 든 것처럼 구는 아이와 같았다. 그는 부모님의 이혼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실상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부재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다른 친구는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모두 부모님이 데리러 오지만, 저는 친구와 함께 걸어서 집에 갔어요.”
어린 시절의 환경은 그가 지금처럼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기질을 갖게 된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가족과의 시간이 부족했던 어린 소년은 외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게임을 선택했다. 하지만 류청송은 부모님에 대한 책망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엄마는 밥 먹을 때나 저녁에 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어요. 초등학교 때는 잠시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선생님 댁에서 머물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돌아갔어요. 종종 엄마는 저녁 때 말고는 저와 같이 있을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바로 이때부터 게임을 접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자주 놀았는데, 류청송은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할 시간이 없기도 했고 집에 컴퓨터 한 대를 마련했기 때문에 게임 할 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를 시작한 건 그가 중학교 2, 3학년쯤 되었을 때였다. 사실 처음에는 놀 시간이 별로 없었고 랭겜 점수를 올릴 때도 그냥 가볍게 했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려도 1,700-1,800점을 찍고는 했다.
그럼에도 처음의 류청송은 훗날 프로 선수가 되었을 때처럼 《리그 오브 레전드》에 심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 설렘보다는 오랫동안 싫증 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류청송은 점차 언제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갈수록 《리그 오브 레전드》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시에는 2013 월즈가 한창이었는데, 그는 YY(생방송 플랫폼)에서 WE와 iG의 경기를 보거나 ‘둥샤오사(선수 출신의 유명한 게임 스트리머)’의 생방송을 보고는 했고, 심지어 랭겜 점수가 더 올랐을 때는 프로 선수와 매칭되기도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 티어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아이오니아 서버에서 다이아 1부터 챌린저까지 찍었으며, 그때는 챌린저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는 이 성적을 일주일 동안 유지했는데, 심지어 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주말에만 게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친구와 함께할 때도 부러 자신의 날카로운 실력을 자랑하지 않았다. 대개 그 연령대의 남자아이들은 자신을 또래와 비교하길 좋아하고 끊임없이 자기과시를 욕망하며, ‘화산논검(华山论剑)에서 나만이 유일하다’ 같은 분위기를 좋아한다.
※ 화산논검(华山论剑):중국 무협 소설의 대가 김용(金庸) 작가의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에서 유래된 것으로, 화산(중국의 5대 산 중 하나이자 중국의 뿌리로 불림)에서 이뤄지는 무술대회를 의미함. 현대에서는 공개 대회나 학술토론으로 확대됨.
하지만, 류청송이 ‘보통의 것’과는 다른 규격 외라는 건 어릴 때부터 드러났다.
2.
2014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의 경력 동안 류청송은 OMG 2군에서부터 시작하여 LSPL의 TCS, LPL의 NewBee를 거쳐 현재의 FPX까지 4단계를 지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 있었나요?”라는 질문에 류청송은 부인하며 “프로 선수를 만나면 처참하게 맞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
2014년, 프로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에 그는 16살이었고 ID는 ‘Kuroko’였으며, 입단한 팀은 OMG였다.
프로 선수의 길을 걷게 된 계기에 대해 류청송은 회상했다.
“당시에 OMG의 단장이었던 ‘하오쯔(耗子)’가 저를 찾아와서는 프로 선수가 될 생각이 있느냐며 OMG로 오는 건 어떤지 물어봤어요. 그때 ‘내가 프로가 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다만 그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본래 당연히 반대하실 것이라고 예상했던 어머니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류청송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마친 후에야 OMG에 합류했고, 2군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이런 선수 생활이 저에게 더 잘 맞았어요. 그때 받은 월급이 1~2만 위안이었는데, 대다수는 이만한 돈을 벌지 못했죠.”
10대 소년은 아직 ‘좋다’와 ‘나쁘다’를 오롯이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일상에서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심지어 일반인보다 더 여유로운 환경 속에 있을 수 있으므로 류청송에게는 나쁘지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류청송이 OMG에서 보낸 시간은 그다지 좋은 추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그 한 해의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처음에는 나이 제한 때문에 훈련 경기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이후에 가능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치기 어린 생각으로 스스로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자존심 때문에 삐딱하게 나갔던 거죠.”
OMG를 떠날 때, 그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꼈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LPL 무대에 오르는 거였어요. 그 안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고 제가 가진 목표를 이루고 싶었죠. LPL 경기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저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16살의 류청송이 프로 선수의 길에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머뭇거림 없는 큰 포부와 자신감, 그리고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영역에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며 경기 속 선수들처럼 되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때때로 잔혹한 법, 늘 ‘한 사람’이 예상했던 궤도를 벗어나고는 했다. 학업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걱정까지 지어진 채 들어섰던 이 길은 뜻밖에도 가시덤불이 널려 있는, 그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람의 경험은 좌절 속에서 얻을 수 있고, 세월의 시험만이 이것을 설익게 할 수 있다.
3.
OMG를 떠난 류청송은 닝보(宁波)시로 향했다.
2015년, LPL의 비시즌 기간에 TCS의 사장인 둥샤오사가 그를 찾아와서 TCS로 데려갔다. 둥샤오사와의 인연은 프로 선수를 시작하기 전부터 맺어졌는데, 둥샤오사의 생방송을 즐겨 보기도 했고 랭겜에서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자신을 보여줄 기회를 줄 사람이 둥샤오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2016년, 류청송은 TCS에 합류했다. 그해에 그는 서포터가 되었고 팀의 주장이 되었으며, ID는 ‘Lqs’였다.
그전까지 류청송이 가장 많이 플레이한 포지션은 ADC였지만 이곳에서부터는 서포터였고, 그의 ADC는 ‘Lwx’였다.
그리하여 2016년은 류청송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한 해였다.
세상에 처음으로 얼굴을 비춘 TCS는 풋내기였지만 강한 잠재력이 있었고, 목 끝까지 숨이 차는 것을 무릅쓰고 결승선을 향해 마지막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2016년, 제10회 ‘도시영웅쟁탈전’의 우승자가 되어 그해 LSPL 서머 시즌 출전 자격을 얻게 된 TCS는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OMG에서의 시간과 비교했을 때, 류청송은 이곳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마주했다. 그는 피가 끓어오르는 경기장을 느꼈고, 관중의 환호와 찬사를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이긴다’라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세월이 류청송에게 가르친 교훈 제1계명이 ‘모든 일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였다면, 제2계명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였다.
지금에 와서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는 여러 이유로 인해 TCS는 LSPL에서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참담한 성적으로 강등됐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나태해지며 훈련 경기를 치르지 않는 등 팀 내 불화가 일련의 풍파를 일으켰다. 결국, 한동안 풍랑의 끝에 서서 온갖 비난을 들어오던 TCS는 안타깝게도 해체를 발표하며 e스포츠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사실 우리가 바로 한 시즌 만에 강등될 줄 몰랐고, 일이 그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 강등 자체는 저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달라진 건 있었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훌륭하지 못해서 강등된 것도 제 실력이 그곳에 머물기에 부족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때의 류청송은 이미 지금의 모습이 어렴풋이 녹아있어 충분한 자신감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TCS에서 보낸 날은 짧았고 LSPL에서의 경기들도 고됐지만, 류청송에게 있어서 이 시간과 둥샤오사 사장은 여전히 감사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많은 걸 몰랐어요. 그래서 성적도 좋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둥샤오사에게 감사해요.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류청송은 TCS를 통해서 경기가 주는 새로운 자극을 맛보았다. 경기에서 승리 후 피가 끓어오르든 패배 후 마음이 회색빛이 되든 심지어 마지막에 몰아치는 비바람조차도 그는 하나하나 감각으로 느꼈는데, 마치 그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좇고자 하는 걸 찾은 것 같았다.
이 기간에 대하여 류청송은 다음과 같이 결론했다.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다면, 너 스스로부터 시작해.”
4.
류청송이 이 2년 동안 가장 큰 압박감을 느낀 순간은 OMG에서 경기를 뛰지 못할 때도 TCS에서의 큰 낙폭을 겪을 때도, 하물며 FPX에서 많은 이의 희망을 어깨에 지고 세계 무대를 밟아야 했던 때도 아니었다. 류청송의 눈에서는 바로 NewBee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2016년 말, 류청송은 NewBee에 합류했다. 그의 ID는 ‘Pinus’가 되었고, 그해의 ADC 파트너는 여전히 Lwx였다.
2017년, 팀과 함께 LPL의 스프링·서머 시즌에 출전했으나 여전히 아쉽게도 두 시즌 모두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그치게 되었다. 스프링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iG를 상대로 3-1로 이겼지만, 이어 EDG에게 0-3으로 패배하며 2라운드에서 멈췄다. 서머 시즌에는 조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Snake를 3-1로 꺾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지만, WE에게 0-3으로 패배하며 다시 멈추게 되었다.
좌절은 하나씩 잇달아 찾아왔고, 이따금 류청송은 ‘원래의 나는 이렇게 안 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NewBee에서의 첫 시즌에서 그의 경기력은 비교적 안 좋았기 때문에 이내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훗날 “게임에서 패고 조용히 만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 그 사람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NewBee에서의 첫 반년 동안 그는 적은 경기를 소화했지만, LPL과 TGA(LDL로 통합되기 전 3부 리그) 간의 차이는 분명히 발견했다. LPL은 TGA보다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고, 경기에서 잘하면 더 많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TGA에서는 경기 전 랭크에서 좋은 성과를 내더라도 기껏해야 “이 사람, 좀 하네?”라는 감상에서 끝났고, 류청송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은 없었으나 긍정적인 영향도 없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목을 끌 수 있는 LPL에서는 NewBee에서 경기를 치를 때마다 자신이 점차 타인의 평가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는 압박감이 심해서 게임 내에서의 제 모습이 너무 이상해졌어요. 첫 경기 끝나고 바로 교체됐고, 그 후에도 출전을 많이 하진 않았어요. 사실 훈련 경기에서는 정말 잘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실제 경기만 시작하면, 꼭 스킬 찍는 걸 잊어버린다든가 하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는지 저만의 플레이를 하고 싶다는 부담감이 있었죠.”
유년기의 환경, OMG에서의 냉대, TCS에서의 실의는 류청송 스스로 어떠한 영향을 받았다고 느끼게 하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감정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좋은 날들은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니, 2017년 말, NewBee는 그 이유를 함구하며 LPL을 떠나게 되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숱한 우여곡절, 그 끝에야 마침내 류청송은 FPX에 도착했다.
5.
어떤 이들은 FPX가 LPL에서 발을 뺀 NewBee의 자리를 덥썩 이어받은 ‘접시받이(接盘侠)’라고 놀렸다. 당시에 다른 팀들은 모두 강호에 이름을 떨치기 위해 앞다퉈 발을 붙이고자 했는데, FPX는 강호에서 그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 팀이었다.
※ 접시받이(接盘侠):중국에서 유행한 주식 관련 용어로, 직역하면 ‘접시를 받다(接盘)’인데 다른 사람이 매도한 주식을 낼름 매수하는 것을 의미함.
2017년 말, 류청송은 FPX에 합류했고 ID는 ‘Crisp’가 되었다. 인연이란 진정 기묘한 것인데, 그의 ADC 파트너는 영원히 Lwx로 짝지어진 것만 같았다.
최초의 FPX는 아직 지금과 같은 명단이 아니었다. 2018 LPL 스프링·서머 시즌에 참가했고 서머 시즌에는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했지만, 이는 류청송에게 별다른 돌파구가 되지는 못했다.
2018년 말, ‘도인비’와 ‘티안’이 합류한 후에야 비로소 갓 태어난 봉황이 눈을 떴다. 기하급수적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기 시작한 FPX는 2019 LPL 스프링 시즌에서 정규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창단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지난해에 플레이오프 주변만 맴돌던 팀으로서는 의미가 남다른 승리였다. 그전까지는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류청송은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모든 게 예상 범위 내에 있었지만 1위할 줄은 몰랐어요. 무엇보다 다른 팀들이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과소평가했죠.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잘 준비했어요.”
TCS와 NewBee에서의 방황을 벗어던진 그는 다시 자신감 가득했다.
FPX는 정규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첫 라운드에서 ‘8위의 기적’ JDG를 만나며 충격적인 패배를 했다. 마치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FPX는 예전의 TCS처럼 다시 한번 여론의 꼭대기에 선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고, FPX가 선택한 정답은 후퇴가 아닌 전진이었다.
이후 플레이오프에서 FPX는 TOP을 3-1로 꺾고 2019 LPL 스프링 시즌 3위를 차지했다. 류청송은 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고, 경기 후 웨이보에서 “봄에 잃은 걸 여름에 반드시 되찾을게요”라고 약속했다.
FPX의 성장과 함께 류청송도 나란히 성장하고 있었다. 좌절에 부딪혀 비틀대면서도 끝내 LPL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솔선자가 되기까지, 류청송은 이제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게임 속에서 몬스터를 처치하고 보상을 획득하여 레벨업하는 과정과 같았다. 누군가는 행운 수치가 높은 채로 시작하여 순풍에 돛이라도 단 듯이 일사천리일 수 있고, 누군가는 수치가 낮아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을 수도 있다. 이들은 운명의 안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 행운의 수치가 전부 소진되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여전히 자신의 실력뿐이라는 걸 알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다.
FPX의 정글 선수 티안은 훈련 경기에서 류청송이 팀의 메인오더로서 가장 결정권이 크다고 밝혔다. 류청송은 화면 속에서의 과묵한 이미지와는 달리 경기에서는 도인비와 함께 경기의 방향과 지휘를 맡았다.
류청송은 도인비의 합류가 FPX를 크게 탈바꿈시키고 자신 역시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는 ‘나는 남보다 못하지 않아’라고 믿게 되었고, 조금씩 ‘소년’의 자신감을 되찾으며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키보드워리어로부터 여러 칭호를 얻은 이 팀은 끊임없는 분투와 성장 속에서 200%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FPX는 낙인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씩 탈피하며 그들의 운명의 색채를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6.
2019년은 FPX와 류청송이 가장 찬란하고 밝게 빛나는 순간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류청송을 신인이라고 여겼지만, 뜻밖에도 사실 그는 LPL 선수 증서 15번의 베테랑이다.
2019년 4월 17일, FPX는 2019 LPL 스프링 시즌 3위를 차지했다.
2019년 9월 6일, FPX는 RNG를 3-1로 꺾고 2019 LPL 서머 시즌에서 우승했다.
과거의 풍랑에서 떠돌던 류청송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눈앞에 섰고, 이번에는 FPX와 함께 다섯 개의 관문을 돌파하여 여섯 장수를 처단했다. 2019 LPL 서머 시즌 결승에서 FMVP까지 수상한 류청송은 마침내 프로 선수로서 가장 찬란하고 밝게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 과오관참육장(过五关斩六将):《삼국연의》 제27장에서 유래된 관용어. 관우가 조조의 방해 속에서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처단한 후 마침내 유비에게 돌아가는 이야기로, 극도로 영웅적인 모습을 나타냄.
어떤 사람은 그를 “서포팅이 신속하고 한타 이해도가 뛰어나며, 시야 장악까지 완벽하다”라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 조각되지 않은 옥처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류청송의 절친한 친구인 ‘클리어러브’도 그에 대해 말했다.
“의지력이 강하고, 자기관리도 정말 철저하고, 다소 고집스러운 면은 있지만 반드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는 사람이에요.”
이곳까지 도달한 류청송은 더는 정수기 옆에 앉아 기회를 손꼽아 기다리던 어린 소년이 아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프랑스 파리를 바라보았다.
앞에 펼쳐진 길이 아득하여 이 어둠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지만, 항상 누군가는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다.
2019년 11월 10일, 프랑스 파리, FPX가 G2를 3-0으로 격파하며 2019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류청송의 활약은 실로 경이로웠다.
2019 월드 챔피언십 주제곡인 ‘열반(Phoenix)’은 이 순간에 완벽히 부합하여 마치 예언된 것만 같았다. 봉황을 정신적 도등으로 삼은 FPX는 초생과 탈피를 거치고, 결국 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신들의 주해를 완성했다.
봉(凤)은 동쪽에서 날아오르고, 황(凰)은 바다를 가로질러 울부짖는다.
FPX는 내내 험난했던 여정을 헤쳐 나가 역사를 창조했고,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를 딛고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전례 없는 전법으로 산을 깎고 바위를 부숴 역사의 인정을 얻었고, 모든 굴곡과 세속을 걷어내고 모든 불공평과 불복을 평정하며 세상에 선언했다――우리는 강하다.
“베를린에서 날개를 펴고 파리로 도약한 봉황의 맑은 울음소리를 샹젤리제 거리에서 들어보세요.”
FPX는 창단부터 우승까지 2년, 류청송은 LPL 입성부터 우승까지 5년이 걸렸다.
류청송의 나이는 불과 21살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류청송의 칼끝은 가장 영광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7.
미래의 날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류청송은 이미 충분히 말수가 적음에도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이길 원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제가 행복하게 자라기만을 바라셨지, 저의 길을 따로 구상하지는 않으셨어요. 이제는 저에 대해서는 마음이 한결 놓이셨죠. 제가 경기에서 더 잘하면, 앞으로의 모든 일은 제가 다 맡을 거예요.”
류청송은 어머니에 대해서 말했고, 그의 과묵함 뒤에는 연한 마음이 있는 듯했다.
FPX의 창단 2주년 축하연에서 “그럴 가치가 없어요”라고 말한 후 모두 일제히 웃었을 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몰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각종 행사에서 항상 수직적인 자세로 별로 말이 없지만, 자세히 보면 눈가에는 수줍은 웃음기가 가득하다.
그는 결코 차가운 사람이 아니다. 단지 표현에 능숙하지 않을 뿐, 소년만이 갖고 있는 수줍음을 간직한 사람이다.
류청송의 팬들은 말했다.
“TCS에서 NewBee까지, 그는 거의 팀이 흩어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떠났고, FPX와는 2022년까지 재계약도 했죠. 사실은요, 그는 입이 무겁고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세게 말하지만 말수가 적고, 까칠한 듯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 같은 형용이 류청송의 이름과 함께 놓이는 것은 결코 부조화스러운 것이 아니다.
류청송은 스스로 자신을 바라봤을 때,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은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게임 외의 다른 취미는 없고, 여행도 밖에 놀러 나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로 할 일이 없을 때는 영화를 보고, 쉴 때는 게임을 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대신에 당장 유행하는 게임들을 한다. 때로는 NBA 같은 스포츠 경기를 보는데, 좋아하는 팀은 LA 레이커스다. 심지어 평범한 20대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도 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을 회상하며 말했다.
“꽤 험난한 날들이긴 했지만, 제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가 그럴만한 실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류청송이 불운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가 LPL에서 바친 청춘과 시간은 그의 어린 시절을 뛰어넘었고, 단맛을 즐기기도 했지만 쓴맛도 삼켰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류청송은 묵묵히 운명의 시험을 바라보았으며, 아쉬움과 실패의 결과를 감내했다.
또한, 당신은 류청송이 행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공통된 가치관의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쥐고 있는 그 영예로운 순간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앞으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절대 자신을 저버리지 말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알려주겠지.
여름이 시작되기 전 류청송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뜻이 맞는 다섯 명이 함께 나아간다면 불사의 봉황으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이 행성에는 당신이 누구든, 무엇을 하든, 그저 어떠한 것을 얻기를 간절히 소원한다면 결국 이것을 이룰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가 존재한다. 이 소원은 우주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당신의 사명이다.